🌸설렘을 모른다던 그대에게

(부제: To. J)

은비 

  울 렁거리는 계절이 돌아왔습니다. 저마다의 사계절 중에 ‘봄’이라는 계절은 참, 사람 마음을 싱숭생숭하게도 만들어서 결국 이 글을 쓰게 만듭니다. 이제는 설렐 것도 없다던 그대에게, 제가 오늘 느낀 봄 저녁의 요상한 공기를 띄워 보내주고 싶네요. 평소와 똑같은 거리여도 이제 더 이상 춥지 않다는 그 마음 하나만으로도 발걸음이 가벼워집니다. 올해 조금 늦은 소식을 들고 온 벚꽃잎도, 완전히 까맣지만은 않은 하늘도, 그 모든 곳에 담겨있는 시간도. 저는 이런 환경을 ‘정신을 붙잡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사랑에 빠질 것만 같은 날씨’라고 하는 걸 좋아합니다. 이런 날씨라면 그대도 조금은 착각할 수 있지 않을까요?

 설렘과 사랑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말인 것 같습니다. 설레면 사랑해버리는 저의 성격 탓인지, 설레야 사랑할 수 있는 인간 본성의 탓인지. 이미 말한 적 있지만 저에게 설렘과 사랑은 동의어입니다. 또다시 돌아와 버린 봄의 길목에서, 실질적으로는 3달도 채 되지 않는 이 계절에 무엇을 또 사랑할지 고민해봅니다. 더 이상 설렐 것이 없다는 그대의 말이, 더 이상 사랑할 것이 없다고 자꾸만 들려서, 그대의 몫까지 함께 고민해봅니다. 학교 중문 골목에 피어있는 목련이 떨어지고 또 밟히며 그 주위를 감싸는 목련향에 설렙니다. 지겨운 일상이라고 하품하지만, 내일에도 찾고 있는 그 관계들에 설렙니다. 우리의 기약 없는 약속을 상상하며 설렙니다. 소소하게 잊어버릴 웃음들과 사진첩 속 담겨있는 미소와 의미 없는 대화들이 설렙니다. 미화되고 미화되다가 결국엔 마모될 이 시간을 사랑합니다.

 저는 이런 기분을 총칭하여 ‘봄 멀미’라고 부르곤 합니다. 설렘이 차고 넘치다 못해 울렁거리기까지 하는 그 마음 말이죠. 이런 날에는 하염없이 시간을 낭비해도 아깝지 않습니다. 봄 내음 묻은 나무 벤치에 걸터앉아 적막으로 가득한 대화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나누다가, 별도 지는 새까만 밤에 아쉬움 묻은 발걸음으로 돌아가는 그 길은 어쩌면 좀 어지럽고 심장이 저릿해집니다. 착각의 계절답게 자꾸만 다른 이들의 설렘까지도 전이되어 결국 그 거리는 곧 설렘으로 가득 차고 맙니다. 그 길을 걸을 때면 애처로웠던 봄비와 잊지 못할 꽃잎과 다시 움트는 새순이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이 저를 멀미 나게 합니다. 집 안 창문을 잠시 열어 환기를 시키면 울렁거리는 이 마음까지도 울컥, 다 토해낼 수 있을까요. 냉기 머금은 저녁 공기가 집을 다 채우고도 남아서 붉은 꽃 핀 저의 두 뺨까지도 식혀줄 수 있을까요.

 너무나도 설레서 애달픈 그 감정까지도 봄노래의 들뜬 선율에 띄워서 그대가 타고 있는 버스 창가 언저리에 보내드립니다. 이제는 잘 들어가셨을는지요. 그럼 내일 또 뵙겠습니다. 

🎐바람, 바람, 바람,

박정익 

 하 늘에는 비행기. 구름을 가르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이. 나는 해맑은 잔디로 뒤덮인 언덕을 올라, 파도처럼 철썩이는 바람에 흔들리는, 초록이 무성한 나무 밑 그림자에 눕는다. 나뭇잎 사이사이로 비치는 해의 밝음에 취해 눈을 흥겨이 감고 콧노래를 부르면서. 누워있는 동안 비행기는 저 멀리 사라지고, 그렇게 몇 대의 비행기가 사라져도 해는 지지 않는다.

 권태는 사람이 받은 몇 없는 선물이다. 단순히 휴식 시간이라는 의미가 아닌, 이제 나는 지쳤으니 그만하겠다는 변명거리가 아닌, 매일의 삶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공간에 들어가서 지나가는 어제와 오늘을 바라보는 시기이다. 그렇게 몇 시간, 수일, 1년, 한세월을 보내면, 어느 날, 그동안 스쳐갔던 비행기가 머릿속을 가로질러, 눈에 그 그림자를 아로새긴다. 그 순간이면, 정말 순식간에 받았던 선물을 빼앗긴다. 태양을 머금은 바람이 불어와, 소리 지르며 나뭇잎을 흔들고, 그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이 눈을 데우던, 주위엔 온통 풀과 언덕뿐인, 하루 종일 한낮의 시간인, 그곳, 내 공간에서 쫓겨난다.

 나만의 온실이 깨지고 나면, 보이는 것은 사람, 수많은 사람과 시간과 미래다. 오늘을 바쳐 내일을 대비해야 하고, 그 내일이 쌓여 미래를 구성한다. 결국, 나는 지금을 사는 것이 아니라 나중을 살게 된다. 이런 끊임없는 굴레에 갇혀 다음을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다시금, 너무나 커다란 존재를 마주했을 때의 무력감에 휩싸여, 힘겹게 언덕을 기어올라 눕는다. 어쩌면 우리는, 권태의 생사와 함께 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저녁이 되면, 침대에 누워 자기 전까지 내일을 생각하지 않고, 휴대폰을 쳐다보는 것이나, 길을 걷다, 선명한 구름을 보면 그저 멍하니 바라보는 것같이.

 정말 좋았다. 한 3주 동안은. 이제는 하늘의 비행기가 보이지 않고, 솜이불 같은 바람도 불지 않고, 오지 않을 것을 위해 오늘을 살고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운행하는 열차에서 떨어져 나와, 존재하는 것이라곤 나 하나뿐이었는데, 눈을 깜빡이면 한 시간이 지나 있었는데, 진실로, 진실로, 따스함이 있고, 잔디로 덮인 언덕이 있었는데. 다시금 열차에 올라, 수많은 승객이 있고, 시간표가 만연한 좌석에. 앉아버렸다.

 하지만, 이런 것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밤이 없다면 낮도 없는 것처럼, 일상이 없다면 권태도 없기에. 언젠가 다시 돌아올 순간을 기다리며 하루를 살아가는 것도 괜찮고, 동떨어짐을 누리기 위해 미래를 사는 것도 괜찮고. 그렇기에, 이제껏 여전히 앞으로도, 나는 권태를 소망한다.

 어느 날, 밝게 웃으며 죽음을 맞이하는 그믐의 모습을 보며, 내일의 아침을 뒤로한 채 밤의 소리를 산책하며, 혹은, 그저 멍하니 천장을 올려보며, 그것도 아니라면, 휴대폰을 바라보며, 다시금 나를 찾아올 바람.

🤔알아차리다

윤서정 

 사 춘기 시절에는 4월이 되면 ‘사월의 발음은 너무 시리다’고 썼다. 스무 살에 여전히 그랬고 스물한 살에 그것을 비웃었고 올해는 어쩐지, 그냥 그랬구나 싶다. 어떠한 시기를 보내주기 위해서는 일정량의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이제는 그때를 과도하게 긍정하거나 부정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저 문장이 구리다는 생각과 별개로 말이다.

 어떤 주제를 받아 글을 쓰게 되는 것은 오랜만이다. 작년에는 학교를 아주 대충 다녔기 때문에, 별다른 글을 쓰지 않았다. 선생님께서 과제로 내 주신 주제를 받고서 내키면 썼고 그렇지 않으면 쓰지 않았다. 완전히 제멋대로군. 학점은 박살났다. 음, 사실 박살난 것이 학점뿐이라면 좋을 것이다.

 해방촌으로 이사를 하고 얼마간 세븐일레븐에서 파트타임을 했다. 주 5일, 하루 7시간씩 근무했다. 해방촌에 와 본 사람은 알겠지만 (오시게 될 분들에게도 당부하는 바이다) 여기에는 언덕이 많다. 남산 밑의 동네이기 때문이다. 세븐일레븐은 해방촌의 무수한 비탈 중 하나에 위치하고 있다. 그래서 카운터에 앉아 있을 때 정자세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약간은 몸이 기울어졌다고 상상하곤 했다. 기울어진 채로, 이 에세이의 주제에 대해 생각했다. 비탈에 위치하고 있는 세븐일레븐을 나서서 찾는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에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는 데이트 코스다. 설렘과 권태에 대해서 생각을 하다가도 손을 잡은 여자와 남자가 들이닥치는 바람에 중단해야 하는 것이다. 내 생활 반경의 대부분이 헤테로 커플의 데이트 코스라는 것을 집을 계약하던 당시에는 몰랐다! (우리 집은 예쁘다. 이 동네에 이만한 조건은 흔치 않기 때문에 알았어도 계약을 했을 것이지만) 그러니까 주말 오후에 엉덩이를 벅벅 긁으며 우편물을 받으러 나오면 잘 차려입은 젊은 커플들과 눈을 마주치게 되는 것이다. 근무는 주말을 포함했기 때문에, 좁기까지 한 세븐일레븐 카운터에 앉아서 데이트를 하다가 들어온 커플들을 상대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나를 npc로 생각하고 있어서 카운터 앞에서 입을 맞추거나 포옹을 한다. 편의점 앞에 커다란 벚나무가 있어도, 집 창문으로 남산타워가 보여도 설렘은 개뿔, 빨리 퇴근이나 시켜주세요.

 그런 나날을 보내면서, 설렘이나 권태의 정의보다는(정의로만 따진다면 두 단어가 아주 닮은 듯도 하다) 그 원인이 중요하다고 느꼈다. 이것은 내가 무엇 때문에 설레는가의 문제이기도 하니까. 설렘은 예측 불가능성 때문에 생긴다. 이것이 새로운 것이기 때문에. 내가 짐작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반대로 예측할 수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도 같다. 그것의 좋음을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설렐 수도 있는 것이다. 기대라는 것과는 굉장히 다른 방식으로 말이다.

 권태는 설렘의 뒤에, 정해진 프로세스처럼 따라온다. 예측 불가능성 때문에 설렘을 느낀다면 그것은 짧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떠한 대상을 알게1) 될 수 있는 방법은 요즈음에 너무나 많기도 하거니와 설렌다면, 대상에게 애착과 욕망이 생긴다면 더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들기 마련이니까. 설렘이 사라졌을 때 그 자리를 대체할 무언가가 없다면 권태가 남는다. 아, 따분해. 아, 질렸어. 아, 그만할래. 아, 죽고 싶어.

 하지만 반대의 경우라면 어떨까? 원래는 지겨웠는데 두근거리는 쪽으로 말이다. realize라는 영어 단어를 좋아한다. 무엇을 알아차리는 건 글을 쓰는 이들에게 뿐만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모든 것들에게 필요한 감각이라는 생각을 한다. 특별하지 않은 것이지만 나에게만 특별한 것. 혹은 특별하지 않더라도 이런 점이 있구나 하고 생각하는 것. 권태로울 때에는 realize가 필요하다. 그것이 설렘을 유발하지 않더라도. 설렘이 없더라도. 설렘보다 중요한 것은 계속 하는 것.

1) 안다는 건 알아차리는 것과는 다른 일 같기는 하다.

+) 이것은 실리카겔의 노래 제목이기도 하다. 이런 노래 추천하면 좀 그래? 아무튼 가사를 동봉하겠습니다.

지금 널 잊어줄게

혼자 무섭지만 이런 것쯤 견뎌볼게

나지막이 걸을 때

들킬 듯 말 듯 지켜보고 선 사람들

웃음을 참게 돼

눈물이 멎게 돼

부끄러운 모습들만

이렇게 이렇게

Please

Release

다시 돌아갈 순 없을 거라고 난 생각해

So Please

Realize

이제 더는

앞서갈 필요도 없지

눈물을 참게 돼

기억을 잃게 돼

부끄러운 모습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