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비슷한 나이에 언어 교육을 시작하고, 같은 단어와 어법을 배우는 데에도 사람마다 말하는 방법이 다르다는 것은. 대한민국에 사는 우리들은 한국어라는 공용어를 공유하고 있지만, 모두와의 의사소통이 수월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당연하다. 자기중심적인 인간이라는 존재는 나의 세상을 중심으로 언어를 이해하지만, 우리는 그 모든 순간에 같은 상황을 겪고, 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런 인간이 내뱉는 말들에는 필히 그 사람의 전부가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리고 나는 요즘 그 사람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언어에 관심이 생겼다.

 사랑해, 라고 말하는 것은 쉬우면서도 어렵다. 사랑은 서로 다른 세계를 꾸려가는 사람들 모두에게 장착된 감정이지만, 이유 모를 무게감이 아무 때나 말할 수 없을 것 같은 부담을 준다. 왠지 남발했다간 진심의 크기가 왜곡되는 것 같으면서도, 그것이 가장 나의 궁극적인 마음이라 표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시가 좋아졌다. 친절한 소설과는 달리 시에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이 이어지고, 한 문단 한 문단 상황이 뒤섞인다. 평론가가 아니기에 그 모든 문장의 의미를 이해할 수는 없지만, 뭉게뭉게 피어나는 감정들은 읽을 수 있다. ‘삿포로에 갈까요?’라는 말은 ‘당신을 좋아합니다’라고 한다. 왜 하필 삿포로인지 따지기 시작하면 미궁으로 빠진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들은 순간부터 삿포로라는 도시는 사랑과 낭만으로 가득 찬다. 얼마 전, ‘너에게서는 멸종된 과일 향기가 난다’라는 구절을 읽었다. 그 문장을 읽은 순간부터, ‘너’는 ‘나’에게 무슨 존재일지 상상했다. 그저 과일의 향기였다면 마냥 풋풋하고 달콤했겠지만, 멸종되었다고 표현했으니 가슴 한쪽이 아리기 시작한다. 지나간 사랑인 걸까? 시인의 애틋한 미련을 보며 이런 사랑은 또 어떤 사랑일지 궁금하다. 그리고 시만이 말할 수 있는 어지럽고 독특한 마음 표현에 매료된다. 껍질을 하나씩 벗기다 보면 결국에는 마주하는 순수한 마음이 사랑과 비슷한 것도 같다.

 그렇다면 나의 ‘사랑해’는 어떻지? 다행히도 작년에, 나의 어떠한 모습을 사랑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지 고민해 볼 기회가 있었다. 그리고 그때의 나는 ‘함께하는 미래를 생각할 때’라고 답했다. 당장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앞에는 수만 갈래의 선택지가 놓여있다. 미래라는 것은 현재의 내가 단정지을 수 없는 무한대 중 하나의 점일 뿐이지만, 상대와 함께한다는 하나의 확신을 감히 걸어보는 것이 사랑이다. 하고 싶은 것이 늘어나고, 만약의 상황을 가정하고. 최근에는, ‘보고싶다’는 말이 나에게 커다란 마음 표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집순이인 나에게는, 아늑한 이불에서 벗어나고, 험난한 세상으로 발을 옮긴다는 것에 큰 정성이 따른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흐르는 여름이어도, 호호 김이 눈 앞을 가리는 겨울이어도, 재채기가 나는 환절기여도 그 사람을 만나고 싶은 감정에는 짙은 애정이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텍스트로는 전해질 수 없는 목소리, 말투, 표정을 직접 보고 싶은 거니까. 무엇보다도, 같이 있고 싶은 거니까. 정리하자면, 어떤 일을 겪어도 결국에는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 나에겐 사랑이다.

 문득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의 모습이 궁금해져 물어봤다. 누군가는 닮아가는 모습이라고 했고, 어떤 사람은 약한 순간을 함께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했다. 한국인답게 끼니를 챙겼는지 확인하거나 궁금한 부분이 생기면 사랑이라고 하는 이들도 있었다. 내가 떠올리지도 못했던, 그리고 그에게 딱 맞는 표현이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에게 그것이 적용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표현하는 모습은 달라도 결국에는 다 사랑인 것이다. 누군가는 별무늬 포장지로, 누군가는 체크무늬 포장지로 선물했을 뿐, 우리는 모두 같은 사랑을 주고 있었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처럼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을.

💭마지막 부탁

  당신은 옛날부터 항상 그랬어. 당신이 좋아하는 사람만 아끼고, 재능을 주고, 상을 내렸어. 처음에는 당신이 그런 존재일 것이라 상상하지도 않았었지. 모두에게 열려 있고, 어디를 가더라도 항상 있을 정도로 흔하게 볼 수 있으니까, 그 정도로 쉬운 존재라고, 누구나 당신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어. 그래서 당신을 꽤나 좋아했어.

 언제였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분명 내가 당신을 위해 큰 종이를 샀던 적이 있어. 작다고는 말할 수 없는 내 책상에 올려놓지 못할 정도로 큰 종이였지. 그 종이 위를 꾸며야 했는데, 당신을 위한다는 생각에 차마 마룻바닥에는 내려놓지 못하겠고, 어쩔 수 없이 벽에 붙여놓고 계속 바라봤었지. 벽에 종이의 왼쪽을 붙이고 오른쪽으로 이동할 때,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놓쳐서 종이가 반으로 접혔어. 그때는 무척 속상했지. 보기 좋게 꾸며놓고 당신에게 바쳐야 하는데, 접힌 자국이 남았으니 말이야. 쟁반에 컵을 가득 올려놓고 발을 헛디뎌 컵들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났을 때처럼 가슴이 철렁했어. 벽에 붙이고 난 후엔, 무엇으로 빈 공간을 채워야 당신의 맘에 들까 밤 새우며 고민했고, 종이에 썼다 지우기를 반복했어.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난 당신이 날 좋아할 줄 알았어. 적어도 미워하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했지. 지금 와서 돌아보면 참 대단한 착각이네. 하루 종일 당신만 떠올려도, 떠올림을 넘어 숭배해도 당신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데, 고작 종이 몇 장 샀다고 당신의 손가락에 들어갈 거라고 생각했다니 말이야.

 하루는 당신을 만나려고 시도했어. 몇 달을 생각만 하다가 큰 용기를 냈던 거야. 어린아이가, 정말 어린 아이가 자신을 버린 부모를 만나러 가는 것처럼. 그 아이의 속에는 거대한 기대와 약간의 걱정, 남은 부분에는 겁이 있었을 거야. 그런 아이에게 당신이 어떻게 했는지 기억나? 작은 아이의 몸에 담긴 기대라도 해 봐야 얼마나 크겠어, 기껏해야 대형견 정도 되겠지, 골든 리트리버처럼 실실 웃는 무해한 강아지. 근데 당신은 당신을 향해 미소 짓는 그 강아지를 잡초 뽑듯 뽑아 절벽 너머로 던졌어. 때문에 걱정은 절망으로 바뀌었고, 겁은 물 만난 고양이처럼 이리저리 날뛰었어.

 당신은 높은 곳에서 당신을 따르는 신하들 뒤편의 화려한 의자에 고고히 앉아 있을 자격이 없어. 그 신하들은 다 미치광이들이야. 소수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에게 당신이 주는 것이라곤 낙담과 자기혐오와 불안뿐인데도 불구하고 죽을 때까지 당신만을 숭앙하잖아. 마치 이토록 넓은 세상에 당신 하나만 가치 있는 것처럼.

 난 이제 당신을 부정해. 당신의 존재를 무시해.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그들의 권유를 거부해. 그들의 행복하다고 말하는 미소, 뿌듯함을 느끼는 손, 만족을 부르짖는 눈과 입을 보지 않아. 그들을 인정하고 찬사를 보내는 대중의 목소리도 듣지 않아. 결국에는, 당신이 그들에게 하사한 부정(不淨)의 결과물을 태워 재로 만들 거야. 이렇게 해야만 내가 당신을 떠올리지 않을 것 같아, 당신의 품에 안겨 한낱 춘몽에 광적으로 시달리지 않을 것 같아.

 이렇게 된 건 다 당신 탓이야. 당신이 나한테 한순간의 따스함을 보였더라면, 당신을 향한 나의 마음이 이 따위로 끝나진 않았어. 이렇게 슬퍼하지 않아도 됐고, 당신을 욕하지 않아도 됐어. 하지만 이제 다 상관없어. 난 당신이 후회했으면 좋겠어. 뼈저리게 후회했으면 좋겠어. 더는 나에게 당신을 보여주지 마. 그 흔하게 널린 것들로 나를 현혹하지 마. 제발. 내 마지막 부탁이니까.